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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지는 단순한 노폐물이 아니라 외이도를 보호하는 ‘자연 방어막’입니다. 귀지의 성분과 자정 작용 원리, 그리고 면봉이 귀 건강을 해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합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습관적으로 면봉을 찾아 귀를 후비는 분들이 많습니다. 노르스름한 귀지가 묻어나오면 왠지 모를 쾌감과 함께 "깨끗해졌다"는 안도감을 느끼곤 하죠. 우리는 귀지를 귓속에 쌓인 먼지나 때, 즉 제거해야 할 '더러운 노폐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비인후과 의사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귀지는 절대 파지 마세요." 의학적으로 귀지는 노폐물이 아니라, 우리 몸이 세균과 곰팡이로부터 귀를 보호하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낸 '천연 방어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귀지의 생물학적 정체와 귀가 스스로를 청소하는 놀라운 '자정 시스템(Self-cleaning)'에 대해 알아봅니다.
1. 귀지의 정체: '이루(Cerumen)'라는 방어막
귀지의 정식 의학 명칭은 '이루(Cerumen)'입니다. 귀지는 귓구멍 입구에서 고막까지 이어지는 통로인 '외이도(External Auditory Canal)'의 바깥쪽 1/3 지점에 있는 피지선(Sebaceous gland)과 이구선(Ceruminous gland)에서 만들어집니다.
귀지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우리 몸이 얼마나 치밀하게 방어 전략을 짰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지방 성분: 콜레스테롤, 지방산, 스쿠알렌 등 유분기가 많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귓속 피부가 건조해지는 것을 막고(보습), 물이 들어왔을 때 피부에 스며들지 않게 튕겨내는 '방수 코팅' 역할을 합니다.
- 산성 환경: 귀지의 pH는 약 6.1 정도의 약산성입니다. 이는 세균이나 곰팡이가 증식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 '외이도염'을 예방합니다.
- 살균 물질: 귀지 속에는 세균의 세포벽을 파괴하는 '라이소자임(Lysozyme)' 효소와 면역글로불린(IgG, IgA)이 포함되어 있어 그 자체로 훌륭한 항균제 역할을 합니다.
즉, 귀지를 파내는 것은 우리 몸이 힘들게 만들어 놓은 '항균 방수 코팅막'을 제 손으로 벗겨내는 것과 같습니다.
2. 귀가 스스로 청소한다? : 상피 이동(Epithelial Migration)
"그럼 귀지를 안 파면 귓구멍이 막히지 않을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귀에는 '컨베이어 벨트' 같은 자동 청소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의학적으로 '상피 이동(Epithelial Migr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인체의 대부분 피부는 아래에서 위로 자라며 각질이 떨어져 나가지만, 고막과 외이도의 피부는 독특하게 '옆으로' 자랍니다.
- 시작점: 고막의 중심부에서 새로운 피부 세포가 생성됩니다.
- 이동: 이 세포들은 손톱이 자라듯 천천히 고막 가장자리를 거쳐 외이도 입구(바깥) 쪽으로 이동합니다.
- 배출: 이 과정에서 오래된 귀지와 먼지, 털 등을 빗자루로 쓸어내듯 밖으로 밀어냅니다.
우리가 턱을 움직여 밥을 먹거나 말을 할 때마다 이 이동은 더욱 촉진됩니다. 따라서 가만히 놔두면 귀지는 저절로 귀 밖으로 밀려 나와 떨어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 관련 상식: 귀의 구조는 기압 조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행기를 탈 때 귀가 먹먹해지는 원리가 궁금하다면 [비행기·터널에서 귀가 먹먹한 이유] 글을 참고해 보세요.
3. 면봉의 배신: 귀지 색전(Earwax Impaction)
그렇다면 면봉을 쓰는 게 왜 문제일까요? 면봉의 두께는 외이도 입구와 비슷하거나 약간 작습니다. 면봉을 귀에 넣는 순간, 우리는 겉에 있는 귀지 일부를 닦아내지만, 동시에 더 많은 양의 귀지를 귓속 깊은 곳(고막 근처)으로 밀어 넣게 됩니다.
원래 귀지가 생성되지 않는 안쪽 깊은 곳까지 밀려 들어간 귀지는 자정 작용(컨베이어 벨트)이 닿지 않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쌓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귀지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귓구멍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귀지 색전(Earwax Impaction)'이 발생합니다.
- 증상: 귀가 꽉 막힌 듯한 먹먹함, 이명(귀 울림), 청력 저하, 심한 경우 어지럼증을 유발합니다.
- 위험성: 굳은 귀지를 제거하려다 외이도 피부에 상처를 내면 세균 감염으로 이어져 끔찍한 통증을 유발하는 '급성 외이도염'에 걸릴 수 있습니다.
4. 유전자의 차이: 젖은 귀지 vs 마른 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인종에 따라 귀지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는 'ABCC11 유전자'의 변이 때문입니다.
- 건성 귀지 (Dry type): 회색빛에 가루처럼 부서지는 마른 귀지입니다. 냄새가 거의 나지 않으며,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의 90% 이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습성 귀지 (Wet type): 꿀처럼 끈적거리고 노란색을 띠는 젖은 귀지입니다. 액취증(암내)을 유발하는 아포크린샘과 관련이 있어 냄새가 날 수 있으며, 흑인과 백인의 대부분이 해당합니다.
습성 귀지는 끈적해서 잘 배출되지 않고 뭉치기 쉽지만, 한국인의 건성 귀지는 가루 형태라 자정 작용에 의해 훨씬 쉽게 밖으로 배출됩니다. 그러니 한국인은 더더욱 면봉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5. 올바른 귀 관리법: "덜 건드리는 게 최고다"
귀 건강을 위한 최고의 관리법은 '방치'입니다. 하지만 샤워 후 물기가 찝찝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드라이기 활용: 면봉 대신 헤어드라이어의 미지근한 바람이나 선풍기 바람으로 귓속을 말려주는 것이 가장 위생적입니다.
- 겉만 닦기: 귀지가 밖으로 흘러나와 지저분해 보일 때만, 젖은 수건이나 면봉으로 귀바퀴와 귓구멍 입구(손가락이 닿는 곳)만 살짝 닦아내세요. 절대 귓구멍 안으로 넣으면 안 됩니다.
- 이비인후과 방문: 만약 귀가 먹먹하거나 소리가 잘 안 들린다면, 이미 귀지 색전이 생겼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병원에 가서 녹이는 약물을 쓰거나 전문 기구(썩션)로 안전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완벽한 청소부
귀지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소중한 고막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몸이 매일매일 만들어내는 최전방 방어선입니다. 가렵다고, 혹은 습관적으로 귀를 후비는 것은 내 몸의 방어막을 뚫고 적(세균)에게 길을 터주는 행위와 같습니다.
오늘부터 샤워 후 면봉을 집어 드는 손을 멈춰보세요. 당신의 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게, 스스로를 깨끗이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유의사항] 본 블로그의 내용은 일반적인 건강 정보 및 상식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이나 조언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귀에서 진물이 나거나 심한 통증, 청력 감소가 있다면 중이염이나 외이도염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즉시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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