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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쌀쌀한 날에는 이불 속에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자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죠. 그런데 문제는 아침에 일어날 때입니다. 기분 좋게 일어나서 허리를 펴는 순간,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오면서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낀 적, 다들 있으시죠?

"아이고, 내가 잠을 잘못 잤나? 디스크가 터진 건 아니겠지?"
덜컥 겁이 나서 허리를 두드려보지만 뻣뻣하게 굳은 허리는 좀처럼 펴지질 않는데요. 저도 허리가 자주 아파서 정형외과 선생님께 여쭤봤더니, 뼈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범인은 뼈를 감싸고 있는 '근막'이 고무줄처럼 늘어난 채 굳어버렸기 때문이라는데요.
도대체 밤새 제 허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은 우리 몸의 조직이 변형되는 '크리프 현상'의 과학을 통해 그 뻐근함의 정체를 밝혀드립니다.
1. 허리의 갑옷: 흉요근막 (Thoracolumbar Fascia)
우리 등 뒤쪽, 특히 허리 부분에는 마름모꼴의 거대하고 질긴 하얀 막이 있습니다. 이를 '흉요근막'이라고 합니다.
흉요근막은 광배근, 척추기립근, 둔근(엉덩이) 등 상체와 하체의 주요 근육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허리를 지지하는 '천연 코르셋'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서 있거나 무거운 것을 들 때 허리가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근막이 팽팽하게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2. 고무줄이 늘어났다? : 크리프 현상 (Creep Phenomenon)
몸을 웅크린다는 것은 척추를 둥글게 말아서(Flexion), 등 쪽의 근육과 흉요근막을 강제로 길게 늘려놓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우리 몸의 연부 조직(근육, 인대, 근막)이 '점탄성(Viscoelasticity)'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탄성(Elasticity): 고무줄처럼 당겼다 놓으면 바로 원래 길이로 돌아오는 성질.
- 점성(Viscosity): 꿀처럼 끈적하게 천천히 변형되는 성질.
몸을 잠깐 굽혔다 펴면(탄성) 괜찮지만, 20분 이상 장시간 웅크리고 있으면(점성) 조직이 늘어난 상태로 고정되어 버립니다. 이를 '크리프 현상'이라고 합니다. 늘어난 고무줄을 너무 오래 방치하면 탄력을 잃고 흐물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갑자기 허리를 펴려 하면, 늘어난 조직들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위치에서 당겨지며 극심한 통증과 뻐근함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 관련 상식: 우리는 명치를 맞거나 위협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웅크리는 '태아 자세'를 취합니다. 이 자세의 방어 기제에 대한 내용은 [명치를 맞으면 숨이 턱 막히는 이유]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3. 굳어버린 젤리: '틱소트로피(Thixotropy)' 현상
조직의 물성 변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개념으로 '틱소트로피'가 있습니다.
이는 어떤 물질이 가만히 있을 때는 점도가 높은 고체(젤리)처럼 굳어있다가, 흔들거나 열을 가하면 유동성이 있는 액체처럼 묽어지는 성질을 말합니다. (마치 굳어서 안 나오는 케첩 병을 흔들면 묽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 관절을 채우고 있는 윤활유(활액)와 근막 사이를 채우는 기질(Ground Substance)은 틱소트로피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밤새 움직임 없이 웅크리고 있는 동안 이 액체들이 젤리처럼 끈적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리기 때문에, 아침에 처음 허리를 펴려고 할 때 '녹지 않은 젤리'가 저항하는 듯한 뻑뻑함과 통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 디스크의 역학: 젤리가 뒤로 밀린다
웅크린 자세는 근막뿐만 아니라 척추뼈 사이의 완충재인 디스크(추간판) 내부의 압력 분포도 바꿔버립니다.
허리를 앞으로 굽히면 척추뼈 앞쪽이 닫히면서, 디스크 내부의 젤리 같은 '수핵(Nucleus Pulposus)'을 뒤쪽으로 밀어냅니다.
- 상황: 수핵이 척추 뒤쪽의 신경 다발 쪽으로 이동하여 신경막을 압박합니다.
- 결과: 일어날 때 찌릿한 느낌이 들거나 허리가 펴지지 않는 '잠금 현상(Locking)'이 발생합니다.
다행히 젊고 건강한 디스크는 일어서서 걷다 보면 수핵이 다시 제자리(중앙)로 돌아오지만, 이미 퇴행이 진행된 디스크라면 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서 '추간판 탈출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5. 혈류 정체: 허혈성 통증 (Ischemic Pain)
세 번째 원인은 '피가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몸을 웅크리면 복부 장기가 압박되고, 등 쪽의 근육은 과도하게 늘어나면서 미세 혈관들을 쥐어짜게 됩니다.
혈액 순환이 차단되면 산소 공급이 끊기고, 근육 대사 과정에서 생긴 노폐물(젖산 등)이 배출되지 못하고 근육 속에 쌓입니다. 이 노폐물들이 통증 수용체를 자극하여 뻐근하고 묵직한 '허혈성 통증'을 만듭니다. 자고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고 좀 움직이면 통증이 사라지는 이유도, 다시 피가 돌면서 노폐물이 씻겨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6. 아침에 허리가 더 아픈 이유 (디스크의 수분)
특히 아침에 이 통증이 심한 이유는 밤새 디스크가 '수분'을 잔뜩 머금어 빵빵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중력을 받지 않는 수면 시간 동안 디스크는 주변의 수분을 흡수하여 두께가 팽창합니다. (그래서 아침 키가 저녁보다 큽니다.) 팽창해서 빵빵해진 디스크는 내부 압력이 매우 높은 상태인데, 이때 웅크리고 자서 수핵까지 뒤로 밀려있다면 신경을 누르는 힘이 훨씬 강해져 아침 요통이 더 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허리에게 돌아올 시간을 주세요
오래 웅크리고 있다가 일어날 때 허리가 아픈 것은 고장이 났다는 신호라기보다, "늘어난 조직이 원래대로 돌아갈 시간을 달라"는 몸의 요청입니다.
'크리프 현상'으로 늘어난 근막이 탄력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책상에서 자다가 일어날 때, 혹은 소파에서 일어날 때 벌떡 일어나지 마세요. 천천히 허리를 두드리고, 배를 내미는 가벼운 스트레칭(신전 운동)을 통해 수핵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근막을 깨워주는 1분의 여유가 당신의 척추 수명을 결정합니다.
[유의사항] 본 블로그의 내용은 일반적인 의학 상식 및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웅크렸다 펼 때 다리까지 찌릿한 방사통이 느껴진다면 허리 디스크 질환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신경외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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