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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주사를 맞아도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리는 반면, 누군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자를 보고 "엄살이 심하다"라고 말하고, 후자를 보고 "참을성이 강하다"라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의학적으로 볼 때, 엄살은 성격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그 사람의 뇌와 유전자가 고통을 더 '크게' 해석하도록 설계되었을 뿐입니다. 오늘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통증 역치(Pain Threshold)'의 과학과, 고통을 결정짓는 뇌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파헤쳐 봅니다.
1. 통증 역치(Threshold) vs 통증 내성(Tolerance)
먼저 두 가지 개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혼용하는 '아픔을 느끼는 정도'는 의학적으로 두 단계로 나뉩니다.
- 통증 역치 (Pain Threshold): 자극이 통증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최소한의 지점입니다. 예를 들어, 피부를 누르는 압력이 어느 순간 '아프다'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놀랍게도 이 역치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람 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뜨거운 불에 손을 댔을 때 "뜨겁다!"라고 느끼는 시점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 통증 내성 (Pain Tolerance):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후, 얼마나 오랫동안 혹은 얼마나 강한 강도까지 견딜 수 있는지의 한계점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이 '내성'입니다. 즉, 엄살이 심한 사람은 아픔을 느끼는 시점이 빠른 게 아니라, 아픔을 견디는 뇌의 방어막이 얇은 것입니다.
2. 고통을 증폭시키는 유전자: COMT 효소의 변이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내성이 낮을까요? 가장 강력한 원인은 유전자에 있습니다. 바로 'COMT(카테콜-O-메틸전이효소)' 유전자입니다.
COMT 효소는 우리 뇌에서 도파민이나 에피네프린 같은 신경 전달 물질을 분해하고 청소하는 역할을 합니다.
- 통증에 강한 사람: COMT 효소가 활발히 작동하여 통증 신호를 전달하는 화학 물질을 빠르게 제거합니다. 뇌가 고통을 짧게 느낍니다.
- 통증에 민감한 사람: 특정 유전자 변이로 인해 COMT 효소의 활성이 낮습니다. 이 경우 통증 신호와 스트레스 호르몬이 뇌에 오래 잔류하며, 작은 자극도 오랫동안 강력한 고통으로 증폭되어 느껴집니다.
즉, 엄살쟁이는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유전적으로 '고통 증폭기'를 몸에 달고 태어난 셈입니다.
3. 빨간 머리 앤은 더 아플까? (MC1R 유전자의 역설)
재미있는 유전학적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붉은 머리카락(Redhead)을 가진 사람은 마취가 잘 안 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붉은 머리를 만드는 MC1R 유전자 변이는 통증 수용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붉은 머리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치과 치료 시 일반인보다 약 20% 더 많은 마취제가 필요하며, 열 통증(뜨거움)보다는 냉 통증(차가움)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는 피부색과 통증 감각이 유전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4. 아픈 곳을 문지르면 덜 아픈 이유: 관문 조절설 (Gate Control Theory)
통증은 유전자뿐만 아니라 뇌의 정보 처리 방식에 따라 조절되기도 합니다. 정강이를 찧었을 때 우리도 모르게 손으로 문지르는 행동을 하죠? 여기에는 '관문 조절설'이라는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 척수에는 뇌로 올라가는 통증의 관문(Gate)이 있습니다.
- 통증 신호 (C섬유): 속도가 느린 신경 섬유를 타고 뇌로 올라갑니다.
- 촉각/압박 신호 (A-베타 섬유): 문지르는 감각은 속도가 아주 빠른 신경 섬유를 타고 올라갑니다.
아픈 부위를 문지르면 속도가 빠른 '촉각 신호'가 척수에 먼저 도착하여 통증의 관문을 닫아버립니다. 그 결과 뒤따라오던 '통증 신호'가 뇌로 다 올라가지 못하고 차단되어 덜 아프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사지나 파스가 통증을 줄여주는 기본 원리입니다.
5. 심리 상태가 고통을 만든다 (불안과 편도체)
마지막으로 통증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전쟁터에서 팔이 잘린 병사가 순간적으로 고통을 못 느끼거나(스트레스성 무통증), 반대로 치과 대기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치통이 심해지는 현상이 이를 증명합니다.
뇌의 전대상피질(ACC)은 통증의 '불쾌함'을 담당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 부위가 항상 활성화되어 있어, 신체적 손상이 없어도 온몸이 쑤시는 만성 통증을 겪을 확률이 높습니다. 반면 긍정적인 감정이나 명상은 뇌에서 천연 진통제인 '엔도르핀'과 '엔케팔린' 분비를 촉진하여 통증 역치를 높여줍니다.
결론: 고통은 주관적인 실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대사와 달리, 내가 느끼는 아픔과 상대방이 느끼는 아픔의 크기는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그 정도 가지고 그래?"라고 폄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의 유전자, 뇌의 구조, 그리고 현재의 심리 상태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고통은 그 사람에게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변에 아프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저 따뜻하게 문질러주세요. '관문 조절설'에 의해 그 고통이 정말로 줄어들 테니까요.
[유의사항] 본 블로그의 내용은 일반적인 의학 상식 및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원인 모를 만성 통증이 지속된다면 통증의학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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